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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만난 아름다운 두 배우의 눈빛-<색,계>(2007)영화와 맥주 한 잔 2021. 1. 7. 09:59
선입견이란 무섭다. 영화에 대한 인상도 마찬가지다. 무척 보고 싶은 영화를 기다리면서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 그 영화에 대한 느낌을 혼자 상상하기 마련이다. 예고편이 주는 기만은 본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배반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런 예고편을 보고 나서 가지게 된 선입견은 추후 영화가 개봉하는 시기가 되었을 때 그것을 선택하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개봉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여러 매체들의 반응을 보고 해당 영화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영화 <색, 계>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은 야한 영화라는 것이다. 2007년 개봉 당시 여러모로 떠들썩했던 영화다. 작품성으로도 유명했지만, 그것보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베드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 사람들은 추후 vod 서비스에 업데이트되었을 때 다운로드하여 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찾아보게 만든 건 바로 그 베드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데 주저했고 결국은 멀리했다. 심지어 몇 년 전 이 영화의 DVD를 받게 되었지만 관람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영화를 14년이 지나 2021년에 보게 되었다. 서로 경계하던 왕차이즈(탕웨이)와 미스터 이(양조위)가 서로에게 진심으로 빠져드는 과정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영화에서 베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당시의 비정상적인 광고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세세한 감정 묘사의 영화를 왜 이제야 보았을까. 넷플릭스에 업데이트된 이후 처음 관람하고 며칠 후 아내와 다시 한번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았다.
일제 치하였던 당시를 생각하면 미스터 이는 악독한 인물이었다. 배반자라는 낙인 때문에 주변에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 사람에게도 떳떳하지 못하고 중국사람에게도 미움을 당했던 그는 옆에 다가온 왕차이즈와 가까워질수록 그에게 그런 고립된 감정을 위로받는다. 반면 국가의 독립을 위해 대학생 연극단을 독립운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광위민(왕리홍)은 약간의 호감을 서로 가지고 있었던 왕차이즈를 독립운동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왕차이즈는 막 부인으로 위장하고 미스터 이에게 접근하여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만든다.
언제까지가 이들에게 연기였을까. 지독히 악한 인물이라던 미스터 이가 오히려 왕차이즈를 아끼고 보호하고, 같은 편이던 독립군은 끝까지 왕차이즈를 이용한다. 독립군들은 당사자의 의사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역자 처단에만 눈이 멀어 결국 파멸을 부른다. 영화 속 미스터 이의 눈빛이 조금씩 힘이 풀려가는데, 특히나 그와 왕차이즈가 일본 주점에서 같이 대화하는 장면은 그런 그의 눈빛이 완전히 변하는 것이 보이는 장면이다. 그런 그를 위로하는 건 왕차이즈의 아름다운 노래다. 어쩌면 이 주점에서의 그들의 시간이 두 사람에게 가장 아름답고 마음 편한 때였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반지를 맞추고 찾는 날이 반역자를 처단하는 날이었다. 마음을 먹고 간 왕차이즈의 눈빛은 연신 흔들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미스터 이의 눈빛에는 사랑의 확신이 담겨있다. 빛나는 반지가 아니라 그 반지를 낀 상대방이 보고 싶다던 그의 진심이 담긴 눈빛을 본 왕차이즈는 결국 마음을 바꿔먹는다. 도망치라는 왕차이즈의 말에 황급히 그곳을 떠나 목숨을 건진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가만히 왕차이즈의 방 침대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미스터 이는 그 방을 나서며 몇 번이나 그녀가 있던 그 자리를 가만히 쳐다본다. 그의 눈빛은 촉촉하게 젖어있다.
왕차이즈에게 미스터 이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도 그의 아픔과 약한 모습까지 보았던 왕차이즈가 마지막에 선택하는 건 미스터이었다. 그 임무가 어떤 것이었든 그에게 진심을 전했던 유일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는 것은 왕차이즈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미스터 이가 살 수 있도록 그에게 삶을 선사한다.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 좋았다. 양조위와 탕웨이의 눈빛은 이 영화를 계속 생각나게 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볼 것 같다. 이 영화를 이제라도 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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