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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단절, 여성의 삶을 바꾸다-<어디갔어, 버나뎃>(2020)영화와 맥주 한 잔 2021. 2. 1. 15:44
우리의 삶에 있어 노동은 꽤 중요하다. 노동을 해나감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게 해 주고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다. 아주 단순한 의미로만 본다면 그것이 노동을 하는 일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노동을 통해 기본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지만 노동은 때론 개인들의 삶에 어떤 지향점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 무언가를 본다는 건, 자기 자신에게 꽤 좋은 성취감을 선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꽤 많은 시간을 일이라는 것에 매달리게 되는데. 그건 일종의 시간 투자로 볼 수도 있고 그저 소비되기만 하는 시간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단순히 기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삶의 지향점에 따라 좀 더 발전하기 위한 것인지에 따라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진다. 어떤 의미던 그것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노동은 꽤 창의력이 필요한 활동이다. 단순히 반복되는 활동도 어느 정도의 창의력이 요구된다. 좀 더 작업 패턴을 효율적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안정적인 작업을 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창의력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다. 또한 우리가 전문 영역이라고 부르는 건축가나 예술가,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들 뿐만 아니라, 일반 영역에서의 노동을 함에 있어도 창의력은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에서 일을 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고, 자신 만의 아이디어를 이용하려 애쓴다. 그렇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각들을 실제 업무에 활용하고, 주변의 좋은 평가까지 더해지면 그 노동을 하면서 굉장한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주변의 평가는 노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부차적인 부분일 수 있다. 꾸준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창의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려는 노력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삶을 좀 더 풍요롭고 긍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괴팍한 경력단절 여성, 버나뎃의 이야기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한때 떠오르는 건축가였던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몇 년 전에 시애틀로 이사와 남편 엘진(빌리 크루덥)과 딸 비(엠마 넬슨)와 생활하고 있는 버나뎃은 주변 이웃들과 관계가 좋지 않다. 괴팍한 성격에 외지인이라는 시선이 그를 점점 더 고립시키고, 그와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과 딸뿐이다. 하지만 그 유일한 관계마저도 깨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유일하게 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는 온라인 AI 비서인 만줄라뿐이다. 영화 초반에 괴팍한 행동과 속이 좁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버나뎃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를 그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반적인 주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그는 집에서 특정한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단순한 일만 할 뿐이고, 바로 옆 집 이웃과도 조경 때문에 대립각을 세운다. 이웃의 불평을 들을 때에도 그는 대화로 해결하기보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런 행동은 그를 더욱 위축시키고 혼자 만의 세계로 숨게 만든다. 그래서 남편과의 대화에서도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보다는 당장의 어색함을 그저 넘어가려고만 한다. 결국 남편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져 버린다.
이 모습만 놓고 보면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그저 평범한 주부의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 이후 버나뎃의 과거가 어땠는지를 동영상이나 과거 동료의 말을 통해서 보여준다. 시애틀로 이사 오기 전, 천재 건축가라고 불렸던 그는 여러 독특한 아이디어의 건축물을 직접 설계했고, 시공 작업에도 참여한 예술가였다. 그는 남편과 만나고 여러 번의 유산 끝에 낳은 딸을 기르며 어떤 사건 때문에 시애틀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사 온 후 현재까지 그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그의 경력도 과거에서 멈춰버린 상태다.
천재 건축가의 창의력도 멈춰버린 경력단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이 되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 자신만의 일을 찾아 취업을 한다. 그렇게 시작된 노동을 통해 여러 가지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성취감을 느껴나간다. 하지만 결혼, 임신, 출산과 육아가 찾아오는 시기에 누군가의 경력은 단절된다. 이건 누구나 겪는 일상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일을 잠시 중단해야 한다. 특히나 그 희생을 감당하는 이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자신만의 창의력을 발휘하여 경력을 발전해 나가는 시기에 이런 경력 단절은 삶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잠시 쉰다고 육아휴직을 한 이후 어떤 이들은 다시 노동 현장으로 복귀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복귀하지 못하고 집에 머무른다.
영화 속 버나뎃이 경력을 잠시 중단한 시점은 건축 업계 활동 중에 안 좋은 일을 경험한 직후이기도 하지만, 여러 번의 유산 끝에 태어난 딸을 좀 더 집중해서 돌보는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의 시간을 빼앗는 것보다는 자신이 좀 더 그것에 매달리는 선택을 한다. 애초에 그의 가족이 시애틀로 이사한 이유가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도전하기 위함이었는데, 하루 이틀 딸과 가정을 챙기며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자신의 일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 번 단절된 경력을 이어가는 데에는 사회 시스템의 도움도 필요하고, 가족들의 지지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다시 그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자기 자신의 용기가 가장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버나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용기를 잃어버렸다.
버나뎃은 과거의 실패 때문에 자신이 업계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과거 동료 건축가와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고 자신 있게 쏟아내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다. 그 장면 이전의 버나뎃의 모습은 자신감 없고 우울한 모습이었고, 이웃들과 대화를 나눌 줄 모르는 괴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 동료와 예전 작업 이야기를 하고, 지금 가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할 때 그는 꽤 즐거워 보이고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게다가 건축업계에서 그건 과거 동료와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하던 과거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 중에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한 노동이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
영화는 중반에 등장하는 어떤 사건 이후로 버나뎃의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딸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남극 근방 지역의 여행을 무작정 떠난다. 그의 가족을 포함해 버나뎃 자신마저도 그 자신이 왜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저 우울증 정도로만 생각했고, 남편은 그것이 대화를 통해 해결되지 않자 심리 상담사의 도움을 받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버나뎃이 혼자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만난다. 그것에 완전히 몰입되어 그 일에 집중하는 버나뎃의 모습은 꽤 매력적이다. 그의 얼굴은 생기가 돌고, 다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무엇보다 그것을 해낼 수 있고 꼭 해야겠다는 의지가 다시 살아나면서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깨닫는다.
버나뎃의 가족들도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경력이 단절된 상황에서 자신이 에너지를 쏟았던 그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변해 가는 과정은 옆에 있는 가족들이 세세히 알기는 어렵다. 서로의 대화가 중요하지만 본인 조차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안 좋은 감정들을 억누를 뿐이다. 결국 그건 가족 간의 관계까지도 서서히 멀어지게 만든다. 버나뎃이 자신만의 노동을 할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그 자신과 가족들은 그동안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동안 그는 업계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동료들을 두려워했고, 가족들에게 소홀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고 했으며 무엇보다 다시 시작한 이후 자신의 창의적 활동이 실패할까 봐 겁내고 있었다.
그렇게 경력이 끊겨버린 여성 중 다시 자신이 일했던 업계로 돌아가 자신만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이 즐기고 원했던 일이라면 그 일을 다시 시작해 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이들이 다시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이해도 필요하고 사회에서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환경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다시 그 일에 뛰어들겠다는 자기 자신의 의지와 마음일 것이다. 영화 속 버나뎃은 그 자신의 의지를 찾았고, 그 의지와 자신감으로 가족들도 설득해낸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영화다. 괴팍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에너지와 창의력을 가진 여성 예술가의 감정을 여러 대사와 표정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괴거에 <보이후드>나, <비포> 시리즈에서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이번 영화에서도 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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